essential 6
진리와 그렇지 않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세상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혼재해 있을 것이며, 경험으로 성숙해 가는 인생은 알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잘 산다고 하였는데 보니, 선하지 않은 삶에 속해 있었다면 어떠할까요.
예를 들어, 주변에 어떤 유명한 가방과 그 짝퉁 가방과 일반 가방이 있다고 합시다.
과연 실질적인 가치의 차이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해본다면, 구분에 사실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게도 합니다. 무언가를 담아 이동하는 도구로서의 가방이 그 실제 가치라고 볼 때, 물건을 넣고 옮기는데 거의 전혀 차이가 없음을 통해, 브랜드의 진위 여부는 참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짝퉁 브랜드 제조와 거래를 찬성하지 않은 본인의 경우에도, 이러한 접근을 한다면, 해당 내용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됩니다.
실질적인 물건의 이동 수단으로의 가치에 집중해 본다면, 진짜와 가짜의 논쟁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만, 인류의 오랜 역사와 공통되며 합의라는 가치의 근간으로 형성된 그간의 경제 사회적 접근에 의한다면, 사회적 잘못의 쪽은 제어되어야 하는 관계가 성립될 것입니다.
한편, 가짜 브랜드의 모방을 하지 않고 고유 브랜드 가방을 제작해 팔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문제 소지가 없기에 고유의 진짜가 될 수 있게 됩니다. 실질적인 이동 도구인 가방을 만들어 세상에 소개하며 생업을 이루어 나가기에, 그에게는 더 이상 세상의 죄가 없을 것이며, 제어되어야 할 명분도 없이 시장 질서에 부합하며 나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짜 짝퉁을 만들어야 했는가
무지와 사익과 폭리, 사기 등의 죄성이 그 저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질 낮은 품질 유지와 노력과 고뇌의 부재, 좋은 협업과 정당하게 거쳐야 할 노력 없이 쉽게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 했을 무지와 탐심 등이 저변을 이루며 추구했다는 것이 진정한 차이일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동 도구를 알맞은 가격과 편리성에 집중하는 진심의 접근이었다면, 굳이 그런 가짜 브랜드 추종을 행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알맞은 수준으로 벌고 유지하면서 자사 제품에 애착을 지니며 자부심으로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매자도 이동 목적의 본질에 집중한다면, 굳이 높은 가격 제품과 짝퉁 제품 구매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며, 적절한 것을 구매하거나, 누군가는 기술을 배워 직접 만들어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심을 돌려 종교 영역을 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의 이후 역사의 흐름 가운데, 수 많은 증거를 보여주시며 체험한 사람들에 의한 기록이 존재하게 하시는 가운데, 2021년인 최근을 기점 삼아, 이미 2021년 전 중동의 이스라엘 땅에, 오래 전 약속하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여인을 통해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심의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이후 성장하시어 삼십세 즈음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십자가의 대속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을 밝히 보이시고, 세상 가운데 필이 알아야 할 내용을 제자들을 통해 성경에 담아 전하게 하심을, 이후 이천여 년이 흐른 오늘날의 세상에 수 많은 지역과 국가에 증거가 되어 존재하게 하심에도, 여전히 무지하며 가짜와 같은 존재를 추구함에도 깨닳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경에 벌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음에 대한 방어 변론은 주의해야 하며, 인생이 혼재하는 세상의 삶은 어떠한가요.
예로든, 유명 브랜드 가방과 짝퉁 모방 가방과 일반 가방과 같이, 물건 등을 이동하기 위한 도구인 가방의 세상 가운데 존재 모습과 같이, 종교의 영역이 동일할 수 있을까요.
어느 종교의 창시자 내지는 추종자가 그간 자신은 가짜와 짝퉁 추구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고유의 것을 알맞게 추구해 내어 그것을 지향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그 모습은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 많은 선한 가르침들과 같이, 자신은 적법하며 합리적으로 알맞은 가방을 제조하여 질서에 근거하여 유통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면, 진정성과 지속 가능성은 별개로 하고, 언뜻 앞의 예로 든 가방 제조와 같은 선상의 논증을 따른다면 타당한가 보다 그런가 보다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미 알다시피 모르거나 혼란해 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참 된 구원이 가능한가 여부일 것입니다. 나아가 왜 수 많은 선한 가르침, 과거와 앞으로도 계속될, 이라 하는 많은 모습이 있음에도 굳이, 그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를 보이 셨는가에 의문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다른 모습은 진실로 무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알다시피, 세상의 삶 가운데 좋은 일과 함께 좋지 않은 죄지음의 그 책임과 면책의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 그러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누군가는 인생의 기간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길 것임에도, 인생의 기간과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가의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다르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여전히 천국 자체에 의문이 드는 분이 계시다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증거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려는 자세와 함께 원점부터 다시 보길 바랍니다.
어떤 공동체든 다양한 사람이 있음과 같이, 진리에 거한다는 교만함의 제어가 필요한 이방과 일부 잘못 인도하는 기독교인 등의 존재와 함께, 나아가 기독교의 일부 잘못에 집중하여 전체와 진리 자체를 오도하는 삶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당사자도 그렇게 차이는 없음에도, 누군가의 어느 일부 잘못에 무심하기는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소한 잘못의 반복, 좀 더 잘못된 관계 모습 등에 대해 어느 기간을 거치며 회복을 이루거나 아예 멀어지는 관계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참 부모는 자식의 어떤 잘못에도 책망 징계 여부를 넘어 결국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 안기에 참 부모라고 여깁니다.
그와 같이 세상 가운데 인류의 죄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시며 용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심으로 그 분만이 진정한 인류의 주 되심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단해 봐야 할 부분은 무엇 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대속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도 같은 이적이, 인간사에 당대 존재 가능한 수준의 것과는 비교 불가능한 그 모습이, 다른 가르침, 기록에의 유무일 것입니다.
그런 동일한 수준의 모습이 과거로 오늘날에 어딘가에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가방의 어떤 제조업체와 같이, 구원의 확신과 유일함을 여러 다양한 존재에 가능한 모습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접근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추정을 넘어서 역사적 실증 기록을 통해, 진위 여부에 관한 진실된 정보의 공유시대에 사는 만큼, 그 어떤 비슷함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인간적으로 가능한 보기 좋은 모습, 노력, 눈속임, 첨단 과학기술 등에의 의존은 가능해도 인생 일부에 한하며, 이를 넘어설 수 없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 (눅16:25) 는 말씀과도 같이, 물질적인 풍족이라는 관점을 넘어 세상 가운데의 스스로 높여진 삶의 여러 편만함 등을 포함하여 이 말씀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보입니다.
창조주께서는 피조물 생명체인 인생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신 교회 이외에 참된 구원을 과연 이루게 하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아 세우신 교회 이외에 그런 실증과 실체가 가능할까요.
누군가와 어딘가에 그런 모습이 존재하고 있다면, 진지하게 의문해 봐야 합니다. 그 모습은 진정성과는 거리가 있는 단지 세상적이며 무관심 등의 타협의 결과가 아닌가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예요 라고 하고 싶은 모습에는,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마7:11)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선인과 악인이 같은 곳에 있어도 일반적으로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기에 스스로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고 경험한 만큼 이해하며, 내면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모르지 않듯, 참 부모는 그 자녀를 진정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일관되게 창조주와 세상 피조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음으로 성경에 진리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며 유지되는가 에는 여러 다양한 모습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구원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궁극적으로 좋은 삶, 천국 천사의 삶으로 향하게 하신 길이며, 그 외는 세상의 어둠과 귀신과 사탄에 연루된 미혹의 존재로 향하게 함을 알 수 있기에, 확실한 것을 잡고 쫓음이 언제나 진정한 유익이 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신 구원의 길을 쫓음으로 의심 없이 완전하며 충분할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넘어 선과 악 등의 구별이 불필요하며, 그 모두는 세상의 필요한 존재라고 여기며 방어와 변론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음에도 좋은 것을 선택하는 삶이 여전히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안다는 것은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임에도 깨닳지 못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실천이 함께하므로 진정 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무언가 배워 해당 문제를 풀어낼 수 있어도 계속 되는 삶의 문제 가운데 해당 부분에 대해 틀리지 않고 답을 맞추는 실행이 있을 때, 곧 안다는 것의 지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무지한 어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의 자녀가 되었다 하여도, 세상의 어둠의 미혹과 핍박과 갈등 가운데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삶은 그래서, 진정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도망간 제자의 모습으로 여전히 불완전에 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릴 것을 명하심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성령의 동행하심만이 궁극적인 천국에의 입성이 가능하다는 것일 겁니다.
"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 와 여러 말씀에 미루어, 언제고 미혹되어 교만하여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잊으면 곤란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안다고,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여전히 천국의 권세에 들게 될 것이라는 안일함에 의문해야 합니다. 믿지 않은 이방인들의 모습보다는 낫지 않는가라는 미혹에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도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경험이 때로는 없지 않을 것임에, 그러하므로 연옥을 두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지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게 대하는 누군가의 진정성과는 거리가 있는 타협의 모습과 회피의 언어를 진리에 근거한 진심이라 여기는 잘못에 이르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에 길을 잃었거나 잘못 들었다면 제 길을 찾아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방문하려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길을 잃고 헤매거나 길을 잃었는지도 모름은 결국, 목적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신 오순절의 기념일의 때에, 실천이 함께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래보며 도리어 순전한 사람이 참된 누군가의 말을 쉽게 믿고 따르며 실천하듯, 어린아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성령의 동행하심으로 전하신 진리의 좋은 가르침을 주심을 감사함으로 믿는 인생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눅 24:49)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 (행 2:1-47)
융통성이 좀 부족하여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면 이런 모습을 경험한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시 있기는 한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신앙의 자유에 따라 당시와 정확한 모습을 경험한 후 교회를 이루어 나가겠다 하는 바램도 가능할 수 있기에 다만 너무 늦지 않게 되기를 바래보며, 증거하신 뜻의 취지에 합당하게 세상 가운데 알맞게 적용하는 모습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May 2021